열대야
1
해가 이미 지고 있었다. 뉘엿한 시간까지 한풀과 초설은 길을 걷고 있었다. 풀은 앞에서, 설은 뒤에서. 여느 연인의 모습과는 다르게 일렬로 서서 걷는 요상한 모습이었다. 풀은 연신 뒤를 돌아보며 말을 걸어댔다. 그러면 설은 땀을 삐질 흘리면서 짜증이 가득 묻은 표정으로 풀을 바라볼 뿐이었다.
“아이스크림 먹을까?”
설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풀은 뛰어 갔다. 설은 그런 풀의 뒷모습을 보다가 그늘 가로 들어갔다. 연신 땀을 식히면서 숨을 고르고 있었다. 헐레벌떡 뛰어오는 풀이 보이자 설은 다시 눈을 감았다. 숨이 다시 천천히 흐를때까지. 들숨과 날숨에 신경을 집중했다. 이미 오고 있는 풀이었지만 마치 눈을 쎄게 감을수록 소멸되는 것마냥. 설은 그저 눈을 꼭 감았다.
“맛있겠지? 이달의 맛이래!”
풀의 뜨거운 입김이 설의 얼굴에 닿을 때마다 참을 수 없는 불쾌함을 느꼈다. 설은 반 쯤 녹아 뚝뚝 흐르는 아이스크림을 바라 만 보았다. 아이스크림으로 범벅이 된 손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설은 휴지를 풀의 가슴팍에 던졌다. 그리고 다시 내리꽂는 햇살 속으로 걸어갔다. 설의 손수건을 보면서 풀은 알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묘한 웃음이었다.
2
“조금 덥긴 해도 같이 걸으니까, 좋지 않아?”
천천히 다시 빠르게 설의 걸음에 속도를 맞춰가며 풀은 물었다. 여전히 일렬로 걷고 있었지만 풀은 설에게 다가갔다가 멀어짐을 반복했다. 그러다 슬쩍 설의 옆자리에서 걷기 시작했다. 설은 대답이 없었다.
“잠깐 쉴까?”
설의 앞을 막으며 물었을 때야 비로소 풀은 설의 눈을 볼 수 있었다. 설의 눈을 좋아하는 풀은 참으로 기뻤다. 오늘의 눈이었다. 사실 어디든 안 예쁘랴. 살포시 설의 손을 잡고 잔디 언덕으로 갔다. 아까부터 계속 걸어온 설이 걱정이 된다. 풀은 자신의 남방을 벗어 바닥에 깔아주었다. 설은 남방을 보다가 앉았다. 옆에 앉은 풀은 몸을 뒤로 반 쯤 기울였다. ‘무슨 일 일까나’ 생각하면서 설의 얼굴을 찬찬히 보고 있었다. 아무리 무더위 속이라도 가만히 있다 보면 바람이 느껴지는 법이다. 더위가 가실 만큼은 아니더라도, 잠깐 숨을 돌릴 정도는 되는 살랑 바람.
설의 얼굴은 참 아름다웠다. 앞머리가 없어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머리카락을 따라가면 설의 얼굴이 보인다. 이마, 눈썹, 눈, 광대, 입술까지. 하나의 선이 아름답게 떨어진다.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어서 완벽한 안정감을 느낄 수 있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이다. 기분이 다시 좋아진다.
한 쪽에서는 싸움이 한창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고성이 오가고 있었다. 풀은 그 싸움에 눈이 팔려있었다. 사람들 틈 사이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유추하느라 머리가 바뻤다. 무더위에는 가만히 있어도 땀이 난다. 저렇게 엉겨 붙어 싸우니 개운할 리가 만무하다. 없던 감정의 골도 생길 판이다. 남정네 둘이 서로 멱살을 잡고 흔드는 모습은 보기만 해도 답답하다. 얼마나 흔들었는지 옷과 머리가 땀으로 젖어있다. 열심히 잡고 흔들던 둘은 서로를 노려보며 숨을 고르고 있었다. 무겁고 뜨거운 입김이 서로의 얼굴에 닿을 것이다.
3
풀은 설에게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설이 있던 자리는 자신의 남방만 있을 뿐이었다. 갑자기 머리가 아득해지고, 이마에는 땀방울이 맺힌다. 저 멀리 서 걸어 가는 설의 뒷모습이 흐릿하게 보인다. 풀은 남방을 쥐고 선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설을 붙잡아 돌려 세운 후 ‘놀랐다’고 말을 건내본다. 설의 표정을 살피고 거친 숨을 고르면서 괜히 장난 어린 웃음을 짓어본다.
“헤어지자”
설은 눈을 숙인 채 말을 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갑자기’라고 말하면서 설의 땀을 닦아 준다. 설은 풀의 눈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아니야.”
풀의 어두 어진 표정을 보자 설은 고개를 돌린다. 풀은 손에 쥔 남방을 꼭 쥐었다.
“…너무 더워서 그래. 그래서 숨도 턱턱 막히고, 짜증나고, 아무 생각도 않나는 거야. 더위가 그렇잖아. 그래서 다들 더위가 가시길 바라곤 하잖아. 시원한데 들어가자. 그럼 한결 나아질거야. 일단…일단 시원한 데로 가자.”
설의 손을 잡고, 보이는 간판으로 들어가려는 풀이었다. 설은 풀이 잡은 손을 조심히 뺐다. 풀의 손을 잠시 바라보다가 설은 가던 방향대로 걸어갔다. 풀은 그저 쳐다볼 수 밖에 없었다. 모퉁이 너머로 설의 머리카락이 흩날리는 것을 바라보고 있었다. 풀은 설을 향해 뛰어갔다. 하지만 설은 저 멀리서 하나의 점이 되어가고 있었다.
4
풀은 가게로 들어갔다. 말 없이 창가 자리로 가서 앉았다. 곧 주인장이 나왔다. 주인장이 물과 메뉴판을 내왔다. 가게 내부를 가득 채운 찬 바람이 느껴졌다. 풀의 숨이 잦아들었다. 주인장에게 다가가 위스키 한 잔을 주문하고 자리로 돌아왔다.
풀은 자신의 숨소리에 집중을 했다. 설을 떠올리면서 천천히 숨을 내쉬어 보았다. 숨소리가 귓가에 맴돌았다. 후.하. 풀은 울기 시작했다. 주인장이 놀라서 휴지를 가져다 주었다. 풀은 휴지에 얼굴을 묻고 울었다.
한참이 지나가 가게 문이 열렸다. 환하게 웃으면서 설이 들어왔다. 저벅저벅 걸어와 풀 앞에 앉았다. 환한 웃음을 머금고, 울고 있는 풀의 머리를 매만져주었다. 풀은 얼굴을 들어서 설을 바라보았다. 자신을 향해 환하게 웃고 있는 얼굴들이 보였다. 덥지 않은 시절의 설의 얼굴이 스쳐지나갔다. 언제나 설은 웃고 있었다. 더위가 빼앗아 가버린 것은 설의 웃음이었다. 풀은 마지막으로 설의 웃음을 바라보면서 눈물을 꿀떡 삼키었다. 눈을 꼭 감은 채 설의 웃음을 떠올리고 있었다. 설은 환히 웃으며 울고 있는 손을 잡아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