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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ifter/비평 한 발짝

여성주의 비평

by cacto19th 2020. 4. 28.

 

1. 여성주의 비평

   여성주의 비평은 정신분석 비평과 막스주의 비평과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는 전통적 사회 안에서의 여성들이 겪는 억압을 두 이론과의 접목을 통해 해결점을 찾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페미니즘은 중산층의 전문직 백인 여성을 위한 운동으로 인식되는 경우가 많다. , 페미니즘이 여성운동의 전부를 포함하고 있지 않고 여성주의가 페미니즘을 포함하는 의미로써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여성주의 안에 페미니즘이 존재할 수 있지만 페미니즘 안에 여성주의가 포함될 수 없다. 어찌됐든 여성주의과 페미니즘 안에서 여성을 약자, 비존재, 비인간으로써 보고 있다는 점은 공통점으로 볼 수 있다. 페미니즘은 중상층 이성애자 백인여성을 중심으로 일어난 여성해방 운동이고, 여성주의는 억압당하는 다양한 여성을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차이점을 보인다.

 

  여성주의 비평은 문학을 비롯한 다른 문화적 생산물들이 어떻게 여성에 대한 경제, 정치, 사회, 심리적 억압을 강화하거나 약화시키는 지를 점검하는 방법론으로써 존재한다. 이 과정에서 여성주의 비평은 하나의 관점, 획일적인 방법론을 담론하지 않는다. 사실상 많은 여성들이 자신을 페미니스트로 규정하지 않고, 또 그것을 넘어서 페미니스트가 될 수 없는 관점들을 제시하는 것은 여성주의에 대한 협소적이고, 부정적인 인식에서 비롯됐다고 말할 수 있다.

 

여성주의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여성은 사회적인 약자로써 이는 사회 속에서 무의식적으로 규정되는 가부장제 안에서의 약자를 의미를 포함한다. 가부장제 안에서의 약자는 가부장제를 통해 이득을 보는 소수의 남성을 제외한 대다수의 여성과 가부장제 안에서 규정된 남성성을 박탈한 남성을 의미한다. 이때의 이득을 보는 소수의 남성은 보편적인 의미로써 받아들여진다. 여성은 보편적 의미가 아닌 이상한 존재 즉, 이방인으로써 받아들여진다.

 

 

2. 가부장적 여성에서 벗어나기

  가부장적 여성이란 가부장제의 규범과 가치관을 내면화해온 여성을 의미한다. 가부장제는 전통적 성역할을 조장함으로써 남성에게 특권을 부여하는 문화이다. 따라서 고착화된 전통적 성역할으로 남성은 합리적이고 주체적인 존재로써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만 여성은 연약하고 감정적이며 순종적인 존재로써 평가를 받게 된다. 이러한 전통적인 성역할은 오늘날까지 존재하는 사회적 불공평을 정당화하는 데 매우 획기적인 역할을 한다.

 

  가부장적 여성에서 벗어나는 것은 이러한 전통적인 성역할에서 벗어나는 것을 의미한다. 이때에 가부장적 여성은 단순히 생물학적 여성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전통적인 남성성에 부합하지 않는 남성들은 (흔히 여자같다라는 식으로 조롱당하곤 하는 남성들)까지 포함한다. 이러한 모습들을 통해서 우리는 여성주의가 결코 여성들만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게 된다. 가부장적 사회에서 남성은 여성적 자질을 경멸하는 존재이자 가부장제에서 기대하는 여성상을 통해 현실의 여성을 무력화시키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따르게 만든다.

 

3. 길들여진 여성, 길들여진 남성

  전통적인 성역할이 사회 제도로써 자리잡고, 또 한쪽만을 위한 특권을 위해서 정당화의 도구로써 사용되어오면서 많은 여성과 남성들이 사회적으로 길들여져 왔다. 이를 통해서 가부장제로 인해 발생는 많은 실패자들이 그들 자신을 문제로써 인식하지 못한 다는 문제를 낳게 된다.  

 

  전통적 성역할 안에서 여성은 길들여져 왔다. 여성은 도덕화된 성역할 안에서 추구되는 여성상을 통해 여성들의 혹은 사회가 바라는 모범이 되기를 소망하게 되었다. 동화에서도 찾을 수 있듯이 전통적 관점에서의 여성은 가정 학대를 견디고, 자신을 구출해줄 남성을 묵묵히 기다림으로써 결혼이라는 보상을 얻게 되는 존재이다. 이 과정에서 여성의 주체적인 인간상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전통적인 여성상을 잘 따르는 여성을 기대하게 만들고, 그에 따른 사회적 보상을 약속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수학을 잘 하지 못하는 여자아이는 여성스럽다라는 칭호의 사회적 보상을 받게 된다.

 

  대다수의 남성들 역시 이러한 전통적인 입장에서 길들여지는 모습을 보인다. 남성들의 경우 전통적인 남성상을 사회가 제시하고, 그것에 해당않는 남성을 용납하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를 형성함으로써 전통적인 남성으로 길들여오고 있다. 전통적 관점에서 남성이란 실패가 용납되지 않는 남자, 강한 남자를 의미하는 데 이때의 남성에게 가정을 책임질만한 경제력은 최소한의 성공기준으로써 작용한다. 비현실적인 경제적 성취를 강요당하는 남성들이 실패할 경우 다른 식으로 남성성을 회복하려고 한다. 대표적인 모습으로는 독주를 잘 마시는 남성’, ‘(스포츠 등)분노하는 남성으로 실추된 남성상을 회복하려는 시도로 해석된다.

 

  따라서 여성주의를 통해서 우리는 여성뿐만 아니라 남성의 모습을 통해서도 많은 것들을 배울 수 있게 된다. 우리의 절반이 억압받는 형태는 실제로 나머지 절반이 혜택을 누리고 있음을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나머지 절반이 혜택을 받고 있다는 환상을 통해서 권력의 진정한 억압을 은폐하게 된다. 혜택을 받는 권력의 소수자들과 현실에서 받는 좌절과 분노를 이용해 서로 싸우게 만드는 다수의 억압받는 사람들이 존재하는 것이다.

 

4. 착한 여자, 나쁜 여자

  전통적인 성역할 안에서 여성은 두 가지 측면으로 나뉘게 된다. 착한 여자와 나쁜 여자이다. 착한 여자는 전통적인 성 역할을 받아들이고, 가부장적 규범에 순종하는 여자를 뜻하고, 나쁜 여자는 이러한 전통적인 측명에서 요구되는 여성의 역할을 받아들이지 않는 비정상적여자이다. 사실 상 이러한 구별법은 가부장적 남성들의 욕막이 투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가부장적 남성들이 여성을 착한 여자와 나쁜 여자로 나눔으로써 자신들의 기준에 부합한 여성을 만들고, 자신들의 남성성을 위협받지 않으려는 것으로써 가부장적 남성들의 욕망이 투영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가부장제 안에서 규범을 어지럽히는 나쁜 여자는 자신을 표현하고, 욕망을 충족하는 데에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는 데 반해, 착한 여자는 자신만의 욕구가 존재하지 않음을 기억해야 한다. 착한 여자들에게 만족감이란 전통적 가치관안에서 만들어진 여성상을 충분히 이행하고 있을 때 즉, 가족들을 충분히 잘 돌보고 있을 때에 나타나기 때문이다. 중요한 점은 착한 여자와 나쁜 여자 모두 가부장제 안에서 물건 취급받고 있다는 것이다. 21세기에서 여성의 역할이 사회적으로 확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일하는 여성이 여전히 가사노동과 일을 병행하고 있는 점에서 여성의 주체성은 아직도 타인의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5. 가부장제라는 이데올로기를 넘는 길

  하나의 이데올로기는 자기모순적이고, 비논리적인 지점이 있다. 우리는 이러한 모순에서 이데올로기의 작동방식을 이해하게 되고, 이데올로기의 바깥영역을 상상하게 된다. 반대를 더 강력히 반대하는 것은 때로는 이중구속으로 반대에 더 매이게 됨을 알게 한다. 동성애를 더 반대한다고 해서 동성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동성애 문제 자체에 더욱 매이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따라서 다양한 학제간, 다중학문적인 방법들을 활용하여 각자의 주체성을 형성하는 방법을 모색해야 하는 것이다. 주체성을 다루는 방법이 그것을 피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방법을 통해서 인식하고자 함으로 주체성 범주 안의 해석을 가능케 한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6. 프랑스 여성주의 - 유물론적 여성주의

  프랑스 여성주의의 큰 뿌리는 유물론적 여성주의와 정신분석학적 여성주의로 나뉘어져 있다. 유물론적 여성주의의 대표주자는 시몬느 보봐르, 크리스틴 델피, 콜레트 기요맹 등이 있다. 정식분석학적 여성주의의 대표주자는 엘렌 식수, 루이스 이리가라이, 줄리아 크리스테바 등이 있다.

 

  유물론적 여성주의는 사회가 여성들을 억압하는 물질적, 신체적, 경제적, 사회적, 심리적인 원인들과 이 원인들을 지배하는 가부장적 제도들을 검토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다. 정신 분석학적 여성주의는 가부장제가 여성의 심리적인 경험과 창의성을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 가에 중점을 두고 있다.

 

1)시몬느 보봐르

  시몬느 보봐르는 가부장제 안에서 여성은 다른 존재일 뿐만 아니라 부족한 존재로써 정의내려진다고 보고 있다. , 여성은 남성의 타자로써 존재한다는 것이다. 남성보다 못한, 남성의 세계에 살아가는 이방인, 남성의 현재의 모습만큼 충분히 발달되지 못한 존재로써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러면서 이러한 인식은 태어났을 때부터 가지고 있던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것으로 해석하였다. 보봐르는 여성 모두가 아이를 원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모성 역시 갖고 태어나는 본능적인 것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만들어 진 것으로 바라보았다.

 이러한 맥락으로 결혼 역시 여성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으로 보았다. 여성들이 가부장제의 바람대로 아이들과 남편에서 삶의 의미를 찾아서는 안된다고 주장하였다. 동시에 여성들 스스로가 자신들의 예속상태를 인식하는 것이 어려운 이유로 억압받는 다른 집단과 달리 서로의 억압을 공유할 수 있는 장이 많지 않아서 임을 지적했다. 이러한 보봐르의 주장은 50~60년대의 미국의 시대상을 담은 이론이지만 오늘날의 한국 내에서 여전히 유효하게 적용되고 있다. 이러한 점이 시사하는 바는 아직 우리 안에 회복되지 않은 억압된 여성이 존재하고, 그 억압된 여성의 지위가 어느 정도의 위치를 가지고 있는 지를 보여주고 있는 씁쓸한 자화상인 것이다.

 

 2)크리스틴 델피

  크리스틴 델피는 1970년대 유물론적 여성주의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장본인이다. 델피는 가족 안에서 계급으로써 여성을 주목해야한다고 말했다. 사회를 구성하는 요소가 상위 계급이 있고, 그 상위 계급에 억압받는 하위 계급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관계는 가족 안에서 계급적 억압으로써 여성이 희생당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결국 여성은 계급적 억압과 여성적 억압이라는 이중적 억압을 당하고 있는 것이다. 델피는 결혼에 대해서 여성을 무보수 가사노동에 옭아매는 노동계약으로써 이해하고 있다. 직장에 나가는 여성이 증가함에도 가사노동과 양육이 여전히 여성의 책임으로 남는 것은 여성을 집 안의 사람으로 축소시키는 가부장적 흔적임을 지적한다. 또한 가부장적 남성은 모든 권력을 유지시키기를 바라고, 가부장제에 반대하는 여성은 권력의 동등한 분배를 바란다는 점에서 가부장제 안에서 지배당하는 여성의 모습이 무엇이지를 알게 한다.

 

3)콜레트 기요맹

  기요맹은 하는 일에 따라서 사회적 가치가 정해지는 남성에 비해 여성은 성별에 의해서 규정된다는 점을 문제로 삼았다. 예를 들어 어떤 위원회가 열릴 때에 구성원은 대표 1, 기술자 1, 딜러 1명 그리고 여성 1명이라는 식으로 구성됨을 말하면서 여성이란 인구의 절반에 속하는 존재가 아니라 하는 일의 하나로써 보여지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여성이 주로 소유물로 간주되고, 결혼을 통해 교환되거나 거저 쥐어지는 식으로 규정하는 것이 여성을 인구의 절반으로써 정체성을 가진 자로 보는 것이 아니라 성별에 따른 객체화도니 존재로써 바라보고 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하는 일로써 정체화되는 여성들이 겪는 억압은 전유의 방식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 전유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여성의 시간에 대한 전유(24시간 가사노동자로써 노동력을 인정받지 못하는 여성)

 -여성의 육체에 나온 생산물에 대한 전유(여성의 노동력으로 인정되는 것이 아니라 남성의 소유물 안에서 인정되는 노동이라는 것)

 -여성에게 부과되는 성적 의무(남편의 성을 만족시켜야하는 아내)

 -가족 내의 건강한 남성을 포함하여 혼자 지내기 어려운 가족 구성원을 돌봐야 할 의무

 

7. 프랑스 여성주의 - 정신분석적 여성주의

  프랑스 여성중의의 또 다른 줄기인 정신분석적 여성주의는 집단적 경험보다는 개개인의 경험에 주목한다. , 사회적 제도보다는 개인 내면에 집중한다. 이러한 점은 여성의 억압이 경제, 정치, 사회적 영역에서 억압을 받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내면의 무의식 영역까지 억압이 진행된다는 해석으로 이어진다. 따라서 무의식 영역에서까지 이어지는 여성의 억압과 여성해방이 어떻게 접목될 것인지가 가장 큰 화두가 된다. 저자는 이러한 억압의 현장으로써 언어에 집중했다.

 

 1)엘렌 식수

 엘렌 식수는 서구권의 언어적 특징 속에서 억압의 흔적을 볼 수 있다고 말했다. 여성명사와 남성명사의 특징을 통해서 언어 속에서 보여지는 가부장제의 이항대립적 사고를 주장하였다. 언어들의 특징은 여성명사는 열등한 것, 남성명사는 우수한 것으로 나뉘어 지는 현상을 보인다. 이러한 언어의 성적인 차이는 능동과 수동의 대립적 차이로 이어진다. 이러한 언어체계 속에서 익숙해지면 자연스럽게 여성을 순종적 존재, 남성을 지도자로 자연스럽게 추론되는 것이다.

 

 또한 가부장제 사회 안에서 여성이 권력을 차지함이 여성억압의 회복으로 이어지는 것이 아닐 수 있다. 기존의 사회구조 안에서 권력의 이름으로 남성이 사용되기에 여성이 권력을 가진다는 것이 가부장적 의식이 체화함으로 이어지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떤 기업에서 일정 퍼센테이지를 여성만을 채용하겠다고 발표한 경우, 그것이 여성의 억압에 대한 근본적인 해결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역차별로 작용되기 때문이다. 여성의 능력을 인정하는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엘렌 식수는 하나의 존재로써가 아닌 남성의 도구로써 해석되었던 기존의 가부장제 안의 여성이 해방되기 위해서는 새로운 언어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가부장제 안에 갇힌 언어가 아니라 여성을 하나의 주체로 보는 새로운 언어의 활동으로써 여성적 글쓰기를 제안하였다. 여성적 글쓰기는 주체적 존재로써 여성을 인식하고, 언어 속에 깃든 기존의 규칙과 논리에 저항하는 것을 기본 전제로 삼는다. 이러한 여성적 글쓰기는 상상계적 억압을 해방하는 것으로써 엄마와의 유대관계를 회복하는 글쓰기이다. 따라서 여성만의 글쓰기로 제한되지 않으며 남성이라도 엄마와의 유대감을 회복하는 글쓰기를 할 수 있다.

 

 여성적 글쓰기는 기존 체계에 대한 저항으로써 기존의 방식에서 완전히 벗어난 형식의 글쓰기이다. 양자이론과 자크 데리타의 글쓰기 형태에서도 잘 드러나듯이 기승전결에서 벗어난 특징을 보인다. 기존의 형식이 논리에 기반한 글쓰기, 논리적 추론에 기반한 글쓰기를 지향하지만 논리적 추론 외의 것에는 도달하지 못한 다는 한계성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여성적 글쓰기가 논리적 추론이 놓친 부분과 가부장제의 그늘에 가려진 부분에 도달할 수 있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여성적 글쓰기를 실천하는 작가로는 마르드리스 뒤라스, 버지니아 울프, 윌리엄 포크너, 토리 모리슨, 제인 오스틴, 오정희, 최윤 등을 들 수가 있다.

 

2)루이스 이리가라이

  루이스 이리가라이가 주목한 점은 가부장적 문화 속에서 여성들은 언어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심리적 억압형태로 예속되다는 점이었다. 가부장적 언어가 사실상의 모든 의미를 결정짓는 세계 속에서 여성이 가지는 한계는 자신의 생각을 적극적으로 표현하지 못하고, 자기도 모르게 기존의 방식들을 소극적으로 모방함에 있다고 하였다. 서구철학자들이 여성을 남성을 비추는 거울에 불과하다고 본 점과 프로이트가 남근선망은 남성과 동일시되고 싶은 여성이라고 해석한 점을 근거로 들었다. 이러한 시각에서는 여성은 주체적인 존재로써 욕망하지 않는 것이었지만 루이스 이리가라이는 남근선망 자체가 남근거세에 대한 공포를 여성에게 투사한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체계 속에서 여성은 두 가지의 선택권을 가진다고 말하였다. 첫째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고, 둘째는 가부장제가 보고 싶어하는 여성의 표상을 표방하는 것이다. 이는 독립적 존재로써 주체성을 제한하고, 가부장제의 프레임을 여성에게 씌여야 남성의 정체성을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루이스 이리가라이는 이러한 두 가지의 선택권은 잘못된 것으로 보았고, 여성 그대로 살 수 있는 방식을 택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루이스 이리가라이는 남성이 주체가 되고, 여성은 대상이 되는 기존의 가부장제에서 여성이 해방되기 위해서 가부장제가 여성을 길들이는 데에 사용하는 매개수단을 똑같이 이용해야한다고 주장하였다. , 언어를 사용한 방식으로써 가부장제의 언어를 버리고 새로운 언어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가부장제 속에서 새로운 언어양식을 만드는 것을 주장하였다. 또한 가부장제에 귀속되지 않은 사고방식이나 발화양식을 가지는 여성들의 공동체를 강조하기도 하였다. 이런 해방의 언어로써 여성적 말하기를 제시하였다.

 

 여성의 몸을 원천 삼는 여성적 말하기는 기존의 가부장적 언어보다 한층 다채롭고, 복합적인 동시에 난해하고, 미묘하다. 언뜻 모순적이고, 터무니 없어 보이는 데 이는 여성적 말하기가 기존의 언어방식 안에서 익숙한 사람이 들을 수 없는 말하기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틀 안에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틀을 깨고, 기존의 가부장제가 가지는 사고체계를 벗어나는 방식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적 말하기가 가부장제의 고정관념을 탈피하면서 가부장제를 벗어나지 않는 다는 점에서 한계성을 가진다는 비판을 듣지만 주체로써 여성이 여전히 억압적 환경 안에 있다는 점에서 정당성을 확보하게 된다.

 

3)줄리아 크리스테바

  엘렌 식수와 루이스 이리가라이와는 다르게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여성적 글쓰기여성적 말하기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여성의 본질화가 여성의 무한한 다양성을 다 드러내지 못하고, 가부장적 본질화 앞에서 취약해진다고 보기 때문이었다. 그러기에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여성은 본질적으로 정의할 수 없다라고 봤다. 노동계급이 주변화되고 억압받는 것처럼 여성 역시 주변화되고 억압받는 것으로 보았다. 이는 여성의 정의할 수 없음은 여성의 비존재가 아니고, 주변의 억압적 환경에서 찾는 것으로 해석되어야 한다.

 

 남성과 여성이 가지는 생물학적 차이는 사실상 사회적 차이이고, 사회적 차이는 사회 계약 상의 차이를 반영하다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성과 젠더 간의 구별이 의미가 없어지는 데, 그 구별 자체가 가부장적 체제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줄리아 크리스테바는 이러한 이유들로 여성해방의 출구는 기호계에서 찾아야 한다고 보았다. 기호계는 상징계 직전의 단계로 라깡이 정의한 상상계와 비슷한 단계이다. 이 단계에서는 기호계적 차원이 언어로써 존재하지만 언어로 잘 포착이 안된다는 특징을 갖는다. ‘감사해요.’감사해요?’가 발음상의 표시로는 의미가 구별이 안가는 것처럼 억양, 리듬, 몸짓과 같은 언어로써 구성된 특징이 있는 차원이지만 언어이기에 구별되지 않는 한계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 기호계는 말하는 순간 몸과 목소리를 통해 감성들을 전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이다. 하지만 기호계적 언어 토대는 상징계로 진입하면서 억압된다. 이는 본능적 충동과 엄마와의 최초 결합이 언어의 세계에 진입하면서 억압되는 것을 의미하는 데, 언어 자체가 가부장제의 영토 안에 있기에 그 영역 안에서 언어는 상징계적 차원의 통제를 경험하고, 억압을 낳게 되는 것이다.

 

 주리아 크리스테바가 주장하는 바는 유아기의 기호계로 회귀함을 의미하지 않는다. 위와 같은 한계를 지니고 있기에 예술과 문학 같은 창조적 수단에 기대어 새로운 이해를 도모함으로 가부장제 사고방식을 극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 상징계로 진입함으로 기호계가 억압되면서 상상력이 사라진다. 그 사라진 상상력의 자리를 예술과 문학을 통해서 대안을 꿈꾸고, 다시 상상하는 것이다. 억압의 자리에서 기호계적 관점을 갖는 것은 상상력을 회복하는 것을 의미하게 된다.

 

8. 다문화 여성주의

  흑인 여성들의 여성주의인 우머니즘(Womanism)이 발발하면서 기존의 중산층 이성애자 백인 여성의 억압에만 국한되었던 페미니즘이 확장되었다. 이를 통해서 보다 다양한 여성들의 억압이 논의가 되었던 것이다. 흑인 여성, 치카나 여성, 라틴계 여성, 북아메리카 원주민 여성, 아시아계 여성등의 다양화된 여성주의가 등장했다.

 

 여성과 페미니즘이라는 이름 아래에 하나로 묶여 왔던 여성들의 다양한 억압들에 대한 문제제기에서 시작되었다. 다양한 유색인종의 여성들이 겪는 억압의 현장은 단일적으로 구성되 않고, 둘 이상의 범주로부터 발생된다는 특징을 갖는다. , 흑인 여성이 겪는 억압은 흑인으로써의 억압흑인 여성으로써의 억압이 동시적으로 발생한다. 인종 차별과 성 차별이 순차적으로써 발생하는 것이 아닌 것으로 중층적 억압구조를 만든다.

 

 이러한 것들은 기존의 페미니즘 안에서 소외됐던 문제들이었다. 아프리카계 미국인 여성들로부터 처음 문제제기가 되었을 때에는 젠더 억압과 인종차별적 억압이 따로 다뤄져야 할 문제가 아님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가부장적 억압이 여성으로써 받는 억압이 아니고, 흑인 여성으로써 받는 억압임을 강조한 것이다. 따라서 기존의 페미니즘 운동이 여성의 연대를 증진시키는 것이 아니라 여성의 분열을 가져오는 원인으로 보았다. 페미니즘 운동 아래서 도구적으로 사용된 다양한 억압의 상황 속 여성들이 있음을 강조하였다. 앨리스 워커는 자신을 우머니스트로 정의하면서  “남성과 여성을 모두 아우르는 자기 지역 사람들의 생존과 일체성을 위해, 그리고 여성 및 여성이 수행하는 온갖 종류의 일들에 대한 정당한 평가와 더불어 대화 및 공동체 의식의 고취를 위해일한다고 말했다. 캐서린 드나르는 민족 문화 페미니즘을 주장하며 젠더 문제와 문화적 맥락 간의 연관성을 찾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였다.  

 

  따라서 다문화 여성주의 안에서 필요한 자세는 다양한 억압의 상황에 놓인 여성들을 이해하는 것과 그들 모두를 하나로 모으는 연대정신일 것이다.

 

9. 젠더 연구

  초반의 페미니즘 운동이 다양화되고, 세밀화되면서 보다 다양한 억압 상황의 여성들의 문제로 이어져 왔다. 이러한 맥락에서 이성애자 중심의 젠더 이슈 또한 그 한계성이 있음을 지적받았다. 섹슈얼리티와 젠더를 바라보는 사회의 시선들과 처음부터 남성적, 여성적인 이분법적 잣대에 대한 이의 제기로 이어졌다.

 

 이러한 관점은 성적 본질주의와 생물학적 환원주의의 한계를 통해서 타당성을 확보한다. 먼저, 흔히들 성범죄자들의 변명으로 사용되는 성적 본질주의의 한계로 지적받는 것은 남성 호르몬과 과도하고 공격적인 성격과의 연관성이다. ,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많기에 공격적인 행동으로 이어졌다고 주장하는 것인데 이것은 성적인 본질을 남성 호르몬으로 환원함으로써 위험성을 가진다. 최근 연구결과에 따르면 남성 호르몬인 테스토스테론이 많아서 공격적으로 행동하는 것이 아니라 공격적인 행동을 할 때에 남성 호르몬이 촉진된다라는 점에서 성적 본질주의의 한계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또한 모성애가 여성의 본질적인 본능으로 정의하는 것 역시 성적 본질의 생물학적 환원의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가부장제 안에서 여성이 육아에 할애하는 많은 시간에 비례하게 육아를 하는 아빠에 경우에서도 여성과 동일한 모성애적 감정경험을 한다는 점에서 모성애가 여성만의 한정된 경험이 아님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젠더 문제들은 생물학적인 문제가 아닌 사회적인 구성의 문제인 것이다. 남성과 여성이 자신들의 성 역할 안에서 고착되는 양상을 보이는 것은 타고난 생물학적 이유가 있는 것이 아니라, 그저 사회적으로 길들여졌다는 것이다.

 

 다양한 젠더 이슈들이 가시화되면서 이분법적인, 이항대립적인 문화가 아닌 다양한 관점에서 억압을 바라보는 해방운동들이 발발하였다. 억압에 대한 해방 운동은 탈식민지 운동, 우머니즘, 언더 커먼 운동 등의 다양한 상황 속에서 억압되는 소수들에 대한 운동들로 전개되었다.  

 

10. 여성주의 비평

  흔히들 여성문학을 가리켜 여성이 창작한 문학작품을 떠올리지만 실제로는 여성해방작품과 여성에 관련된 문학 전체를 지칭하는 포괄적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 시작은 전자의 의미였지만 시대에 따라서 변화한 것이다.

 

  80년대 후반의 여성주의 문학비평이 루이스 이리가라이의 여성적 글쓰기와 일레인 쇼왈터의 여성중심비평중심으로 전개되었다. 따라서 여성성과 여성적 글쓰기의 관점에서의 창작과 비평이 주를 이뤘다.

 

  90년대 이후 포스트페미니즘의 도래로 여성의 정체성을 규정하는 자체로 여성에게 또 다른 억압을 작용할 수 있다는 주장이 제시되었다. 따라서 여성을 집단화하여 여성의 동질성을 강화하는 것보다 여성간의 차이와 이질성을 강조한다.

 

 2000년대 이후로 여성작가들은 포스트페미니즘 문학이라고 지칭할만한 창작활동을 이어오고 있다. 기존의 가치에 부합하는 여성성과 남성성의 경계를 없애는 것, 해체 후 재구성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시도들은 페미니즘이 포함하는 다양성이 많아짐에 따라 세밀하게 바뀌고, 복잡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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