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신비평이란
신비평은 비평 역사 가운데서 독특한 위치를 가지고 있는 비평이다. 유일하게 더 이상의 발전을 하지 않는 비평으로써 40년대에서 60년대에 완성된 비평이론이다. 하지만 그때의 문학비평형태가 오늘까지 문학작품의 비평에 영향을 미치고 있는 유일한 비평이다. 이렇듯 40년대와 60년대 사이에서 멈춰버린 비평이론이 오늘날까지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는 까닭은 대부분의 비평이론들이 신비평에 대한 반발로 나왔기 때문이다. 따라서 신비평에 대한 이해는 지금을 사는 우리들에게도 그 필요성이 충족되고 있다.
신비평의 핵심개념은 문학 작품 안에서 찾은 구체적 사건들을 토대로 자신의 해석을 입증한다는 것이다. 신비평 이전의 문학비평으로써 19세기에서 20세기 초반의 비평이론들은 저자에 집중하고 있었다. 저자의 실제 삶과 저자가 속한 시대상을 이해함으로 저자의 의도를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의 관련된 역사, 전기 비평은 텍스트의 여사, 전기적 맥락을 파악함으로 텍스트 분석을 대신하고 있다.
신비평은 이러한 기존의 비평이론과는 다른 식의 비평을 보여주고 있다. 문학작품을 해석하는 유일한 원천은 텍스트 자체에 있음을 주장하며 저자가 의도한 의미에 관해 저자의 삶과 저자가 속한 시대상은 확실한 정보를 주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다. 또한 문학 텍스트가 항상 저자의 의도에 부응하는 것은 아니기에, 저자가 구현하려는 바가 실제 텍스트의 의미와 상응하지 않는 것을 가리켜 ‘의도의 오류’라고 비판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저자의 의도와 문학 텍스트의 의미가 무조건 이어지는 것이 아니듯이 독자의 반응 역시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고 했다. 독자는 텍스트가 실제로 전달하려는 방향대로 반응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독자의 삶에서 겪은 경험을 토대로 텍스트에 투영시켜 반응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개인적인 연상으로 인한 감정의 오류는 인상비평(독자가 어떤 등장인물을 좋아하지 않을 경우 그 인물은 반드시 악인으로 해석되는 것)이나 상대주의(독자가 생각한 의미가 곧 텍스트의 의미가 되는 것)를 낳게 한다.
이러한 오류들은 비평을 하는 데 있어서 혼란을 야기한다. 따라서 신비평 이론가들은 비평을 할 때에 저자와 독자의 반응을 중점적으로 보기보다는 문학작품의 형식적 요소인 텍스트 자체의 증거들에 집중한다. 이러한 텍스트 내부의 증거들은 이미지, 상징, 은유, 각운, 시점, 배경, 인물 형상화, 구성 등과 같은 형태로써 존재한다. 이러한 증거들을 수집하기 위해서 필요한 자세로써 신비평 이론가들은 ‘꼼꼼히 읽기’를 제시했다.
신비평에서 문학작품이란 시간을 초월하는 독립적인 형태로써 존재한다. 시간의 제약을 받지 않는 텍스트는 자체적으로 특수한 질서를 형성해 나간다. 특수한 질서 안에서 형성된 낱말들은 텍스트가 의미하는 하나의 의미로써 해석이 된다. 이를 현대적 언어로, 일상적인 뜻으로 해석한다해도 설명될 수 없다. 이러한 행위를 ‘뜻풀이의 이단’이라고 지칭하였는데, 텍스트 안에서 낱말 하나, 줄 하나, 이미지 하나를 바꾸어서 해석할 경우 전혀 다른 해석이 되어 버린다.
2. 텍스트의 복합성
신비평의 중요한 위치인 형식 요소들은 문학적 언어의 본질성에서 비롯된다. 과학적 언어나 일상 언어는 언어를 통해서 본래의 형상을 기술하는 것과 정보 전달에 그 목표를 두고 있다. 이와 다르게 문학적 언어는 하나의 의도와 체계에 따른 함축적 의미를 가지는 것을 의미한다. 텍스트는 다양한 언어 자원들을 복잡한 통일체로 만듦으로서 독자적인 미적 세계를 창조한다. 따라서 문학 텍스트가 ‘어떻게 의미를 가지는 가’는 ‘무엇을 의미하는 가’와 직결된다. 문학 작품이라는 복잡한 유기체 안에서 각 부분들은 전체와 따로 의미를 가질 수 없기에 실제로 작품이 지니고 있는 유기적 통일성은 신비평 이론에서 문학작품의 질을 판단하는 기준점이 된다.
이러한 유기적 통일성 안에서 텍스트는 삶의 복합성을 구현하게 된다. 동시에 인간이 추구하는 본질적인 질서를 가지게 된다. 이러한 이유로 신비평 안에서는 문학작품의 의미를 설명하는 일과 문학적 위대성을 평가하는 일이 분리될 수 없는 하나의 과정이 된다.
신비평 안에서 텍스트가 가지는 복잡성은 그 안에서 상충되는 다양한 의미들로 구성되어 있다. 이러한 의미들은 역설, 아이러니, 애매성(뜻겹침), 긴장이라는 네 가지 언어적 장치를 통해서 드러난다.
1)네 가지 장치 - 역설
역설은 말이 안되는 듯이 보여지는 내용들이 실제로는 언어적 장치를 통해서 텍스트가 가지고 있는 본질적 의미를 갖게 하는 것을 말한다. 기독교에서 나타나는 부활 신앙의 ‘진정 죽음으로써 진정한 삶을 얻게 한다’라는 것은 자기모순적으로 보인다. 하지만 본질적인 의미로는 육적인 삶의 죽음으로 인해 영적인 삶을 얻게 된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이렇듯이 문학 작품 안에서도 문장적 의미로는 역설적으로 보이는 것들을 해석함으로 내포된 본질적 의미를 찾게 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역설은 문학적 복잡성을 충실히 이행한 것으로 보여진다.
2)네 가지 장치 - 아이러니
아이러니는 어떤 진술이나 그 사건이 그것이 발생한 맥락 속에서 오히려 존재 근거를 상실하게 되는 경우를 뜻한다. 예를 들어서 토니 모리슨의 <가장 푸른 눈>에서는 파란 눈을 갖고 싶은 소녀 피콜라가 작품 말미에서 파란 눈을 얻게 된다. 하지만 피콜라의 파란 눈은 피콜라가 현실감각을 완전히 잃어버린 채 갈색 눈을 파란 눈이라 굳게 믿게 됨으로써 얻은 결과물이다. 신비평 안에서는 이 아이러니가 보다 넓은 의미를 갖게 한다. 독자들은 이 아이러니를 통해서 보다 다양한 관점으로 텍스트를 보게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그 아이러니한 상황, 사건들을 해석하는 과정에서 독자는 그 아이러니가 형성된 이유에 관해서 다양한 해석을 할 수 있게 된다. 이렇듯 문학 작품 속 아이러니를 통해서 다양한 관점들이 존재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의미의 복잡성이 형성이 된다. 이는 하나의 관점을 신뢰하게 되면 다른 여러 관점들이 신뢰성이 무너지기 때문에 이에 대한 작용으로 인간 경험의 복잡성을 반영하고, 텍스트의 개연성을 증가시키는 의미의 복잡성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3)네 가지 장치- 애매성
애매성(뜻겹침)은 하나의 낱말이나 이미지 또는 사건이 둘 이상의 상이한 의미를 발생시키는 경우에 발견이 된다. 토니 모리슨의 <빌러비드>에서는 주인공 시드의 등에 있는 흉터에서 생겨나는 나무 이미지를 통해서 고통, 인내, 재생 등을 암시하게 된다. 과학적 언어나 일상 언어에서 애매성의 의미는 정확한 정보 전달의 실패를 의미한다. 하지만 문학작품 안에서는 이러한 애매성을 통해서 텍스트가 풍부함과 깊이를 가지게 된다. 따라서 애매성은 복합성의 원천으로 받아들여지게 된다.
4)네 가지 장치- 긴장
긴장은 반대되는 것들을 하나로 묶을 때에 발생되는 것을 의미한다. 긴장의 특징은 구체적인 이미지 안에 일반적인 관념을 구현시키는 것이다. 아서 밀러의 <세일즈맨의 죽음>에서 등장하는 윌리 로먼의 집은 음울한 빛에 젖은 자그마한 공간으로서 성난 듯한 오렌지색 불빛을 내뿜는 수많은 아파트 건물들 사이에 둘러 쌓여 있다. 이러한 구체적 이미지를 통해서 도처에 존재하는 강자들의 권력에 희생당하는 약자에 대한 일반적인 관념을 구현하게 된다. 이를 가리켜서 ‘구체적 보편’이라고 한다. 물질적인 실체와 상징적 실체의 대립이 문학 작품 안에서 언어적으로 구현됨으로서 긴장이 형성된다. 이미지, 등장인물, 글자의 특수한 의미를 통해서 발현되는 구체성이 보편적인 의미를 가지므로 보다 넓은 의미를 함축 하게 된다. 윌리 로먼의 집이라는 이미지와 린다라는 인물이 각각 그대로의 모습을 표현하고 있지만 그 이상의 의미를 내포하는 것처럼 말이다.
또한 긴장은 텍스트 안에서 서로 대립되는 역설, 아이러니, 애매성 사이에서 발생되는 역동적인 상호작용을 통해서 만들어지기도 한다. <세일즈맨의 죽음>에서는 혹독한 현실과 자기기만 사이에서 긴장이 형성된다. 세일즈맨과 아버지 사이에서 성공하자 하는 욕망이 너무 커진 월리가 보통 사람이라면 실패할 수 밖에 없는 경쟁 세계 안에서 자기기만에만 의지하며 버티지만 오히려 자기기만으로 쇠퇴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러한 혹독한 현실과 자기기만으로 죽음으로 가는 모습은 서로 대립 함으로써 긴장을 형성한다.
3. 텍스트의 통일성- 꼼꼼히 읽기
이런 모든 언어적 장치들은 텍스트 안에서 텍스트의 복합성을 구축하는데 기여한다. 또한 네 가지의 언어적 장치는 문학 작품의 탁월성을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 네 가지의 언어적 장치는 모든 의미의 다양성과 상호 대립을 통해서 텍스트의 통일성을 형성하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형성된 통일성은 완결된 의미라는 텍스트의 주제가 되지만 텍스트의 화제와는 일치하지 않음을 보여준다. 텍스트의 화제란 하나의 의미로서 텍스트가 화제를 통해서 주제를 형성하게 하게 하는 요소가 된다. 즉, 케이트 쇼팬의 <폭풍우>와 알베르토 모라비아의 <추적>에서는 간통이라는 공통적 화제를 갖지만 텍스트의 주제로써는 다른 의미를 갖게 됨을 볼 수 있다.
꼼꼼히 읽기를 통해서 텍스트의 유기적 통일성이 어떻게 구축되는 지 해석하는 것은 신비평의 중요한 작업 방식 중 하나이다. 네 가지의 언어적 장치가 유기적으로 어떻게 하나의 통일성을 나타내고 있는 지 파악하는 것만큼 자주 등장하는 작업 방식은 비유적 언어를 해석하는 것이다.
비유적 언어는 이미지, 상징, 은유, 직유와 같은 방식으로 등장한다. 이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가 하나의 의미가 됨을 말하기도 하고, 다른 의미 또는 그 이상의 의미를 갖게 하는 것까지를 말한다.
1)비유적 언어- 이미지
이미지는 감각으로 인식되는 사물을 말한다. 이때에 그 인식되는 것들을 다시 말해서 색, 모양, 빛, 소리, 맛, 향, 촉감, 열 등의 모든 것을 포함한다. 이 때문에 이미지는 글자 그대로의 의미를 갖지만 그 이미지를 통해서 얻게 되는 정서적 분위기까지 의미를 가지게 된다. 구름이 잔뜩 낀 묘사를 통해서 날씨에 대한 의미와 함께 그 구름이 잔뜩 낀 날씨를 통해서 비애감을 환기시키는 의미까지 같이 해석될 수 있는 것이다.
2)비유적 언어- 상징
상징은 글자 그대로의 의미와 더불어서 비유적 의미를 갖게 하는 것을 의미한다. 예를 들어서 ‘강’이라는 것은 ‘흐른다’라는 의미와 함께 그 속성에서 비롯된 ‘삶’을 의미하기도 한다. 즉, 유사한 속성을 통해서 추상적인 관념을 갖게 하는 것이 상징이다.
3)비유적 언어- 은유와 직유
은유는 상징이 글자 그대로의 의미와 비유적 의미라는 두 가지 차원을 가진다는 것과는 다르게 하나의 의미, 즉 비유적 의미만을 가지게 된다. 은유는 서로 다른 두 가지 대상을 비교하는 것으로서, 한쪽의 성질을 다른 한쪽에 부여 하는 것이다. ‘내 마음은 호수요’라는 은유적 비유에서 호수라는 글자 그대로의 특징은 존재하지 않는다. 글자 그대로의 특징이 현실이라면 은유는 그 속성에서 비롯된 비유적 의미만 남게 된다. 이때에 ‘~처럼’과 ‘~같이’라는 표현을 씀으로써 은유는 직유로 바뀔 수가 있다. 하지만 ‘마음’과 ‘호수’가 은유만큼 직접적이고 단호한 의미를 가지지 않기에 직유는 한결 유연한 비유라고 할 수 있다.
문학 작품이라는 텍스트 안에서 다양한 언어적 장치들이 유기적으로 작용 함으로써 인간의 보편적 의미를 주제로 구현할 수 있고, 그 복합적인 구현이 통일성을 갖춘 한 편의 예술품이 된다.
신비평의 꼼꼼히 읽기를 통해서 텍스트의 주제를 발견할 수 있고, 그 안에서 작용되는 형석 요소들이 주제를 확립시키는 통일적 방식을 발견할 수 있다. 신비평 이론가들은 텍스트 안에서 이루어지는 해석은 맥락을 통해서 이루어져야 함을 강조했다. 즉, 텍스트 안에서 만들어지는 맥락과 텍스트가 제공하는 언어만이 해석의 토대가 됨을 말한 것이었는데 이를 가리켜서 ‘내재적 비평’이라고 한다. 이러한 내재적 비평이 아닌 모든 비평을 가리켜서 외재적 비평이라고 불렀다. 이러한 외재적 비평은 문학 작품 안에서 심리적, 사회적, 철학적 이론 체계를 사용한 비평 형식을 말한다.
신비평 이론가들은 내재적 비평 과정에서 텍스트는 자신이 어떻게 해석되어야 하는지 스스로 해석자에게 명령을 내리고, 비평가는 이를 간파하고자 개별 텍스트의 고유한 형식 요소들에 초점을 맞춘다고 하였다. 신비평은 이러한 과정인 ‘객관적 비평’ 속에서 이루어진다고 보았다.
4. 신비평의 가치
신비평은 텍스트를 고유한 고정적 의미를 지닌 독립된 실체로 본다. 텍스트 속에서 유기적으로 작용되는 언어적 장치와 특징들은 복합적으로 작용되나 그를 통해서 하나의 통일성을 구축하게 된다. 따라서 신비평이 추구하는 최고의 해석은 텍스트가 어떻게 그 의미를 생산하는 지 가장 잘 설명하는 해석이다. 즉, 텍스트의 유기적 통일성을 잘 설명한 해석이 최고의 해석이 되는 것이다. 신비평 이론가들은 다른 비평가들의 불충분한 독법들이 어떤 의미에서 부적절한 지에 밝혀내는 과정에 집중하기도 한다.
텍스트를 그것이 생산된 역사, 문화와 분리시켜 바라보는 비평가와 텍스트 자체로 단일적인 고정적 의미를 가진다는 비평가는 오늘날 찾아보기 힘들다. 하지만 신비평은 해석의 초점을 텍스트의 형식 요소들로, 텍스트의 의미와 형식 요소들 사이의 관계로 옮겨 오는 데에 성공했다. 하지만 텍스트 안에서의 비평을 꿈꾸던 신비평은 텍스트 안에서 갇혀버렸다. 시대의 흐름은 문학텍스트 자체의 가치에서 문학텍스트가 가지는 이데올로기적 내용이 사회를 어떻게 반영하고 있는 지로 넘어가고 있었다. 그래도 신비평의 가치는 어떤 이론적 관점을 따르는지와는 상관없이 비평의 영역안에서 독립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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